

몽펠리에 시내의 가장 중심부에는 꼬메디 광장(Place de la Comédie) 옆에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 중의 하나라는 파브르 박물관(Musée Fabre)이 있고, 박물관의 맞은편 쪽으로 조그맣게 조성된 예쁜 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위의 사진과 같은 기념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은 이 기념비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몽펠리에 위그노 순교 기념비
이 기념비가 있는 이 공원은 사실 단순한 공원이나 산책로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프랑스 개신교 신앙의 가장 아픈 역사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뿌리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 기념비는 몽펠리에 에스플라나드 광장에 세워진 위그노, 즉 프랑스 개신교 목사와 설교자들의 순교 기념비입니다.
- 왜 이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먼저 역사적 배경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1598년, 개신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개신교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법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개신교인들은 안심하고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 90년 뒤인 1685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그 낭트 칙령을 폐지해 버립니다. 그는 프랑스 내의 모든 개신교인들을 없애고 싶어했습니다.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 예배는 불법이 되었고, 교회는 폐쇄되었으며, 목사님들은 추방되거나 처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몽펠리에는 남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개신교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에 탄압은 더욱 집중되었습니다. 몽펠리에의 개신교인들은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정부군의 집요한 공격을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2.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
기념비에 적힌 내용을 보면 이곳에서 34명의 개신교 목사님과 평신도 설교자 님들이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형 방식은 매우 잔혹했습니다. 교수형, 무자비한 구타, 그리고 산 채로 불태워지는 화형 등 생각만해도 소름이 돋는 끔찍한 처형이었습니다.
그들이 처형된 이유의 공통점은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했고, 예배를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3. 이름과 연도가 말해 주는 것
기념비에는 1690년부터 1754년까지 이 때 처형된 목사님들과 평신도 설교자님들의 이름과 연도가 하나하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기간의 박해가 아니라 60년 이상 이어진 체계적인 박해였다는 증거입니다. 즉, 아버지가 순교당하고, 아들이 같은 신앙으로 다시 체포되고, 또 그 다음 세대가 같은 길을 걷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4. 이들은 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잠시 신앙을 숨길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당시 개신교인들에게 신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양심과 정체성 그 자체였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5. 이 기념비의 마지막 문장
이 기념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맨 아래에 적힌 문장입니다.
“이들의 양심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제10조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인권선언 제10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의견, 심지어 종교적 의견 때문에도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인권과 자유는 혁명가들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말없이 죽어간 위그노들의 피와 눈물이 그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6.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안함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악세사리처럼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단순한 습관처럼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기념비는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서고 있는가?
말씀을 전하고 듣는 일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이곳은 프랑스 개신교가 침묵을 강요당한 자리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도 생명을 다해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이 살아 있었던 자리입니다.
지금도 이 기념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음은 편할 때가 아니라, 생명을 다해 지켜 증명할 때 진짜 참 믿음이 됩니다.”
7. 주목할만한 인물 3명을 꼽으라면…
① 장 루셀(Jean Roussel, 1691–1692)
장 루셀은 같은 이름으로 두 차례 체포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입니다. 장 루셀은 낭트 칙령 폐지 이후, 개신교 예배가 금지된 상황에서 비밀리에 신자들을 모아 말씀을 전하던 열정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신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목사는 아니었을지라도, 목숨을 걸고 “광야”에서 신자들을 위로했던 ‘평신도 설교자’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입니다.
1차 체포 (1691년): 그는 1691년경 처음으로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위그노 설교자들에게는 사형이나 갤리선 노역형이 내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는 어떤 경위로든(일시적인 도주나 석방 혹은 감시 소홀 등) 다시 신자들 곁으로 돌아가 설교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2차 체포 및 순교 (1692년): 이듬해인 1692년, 그는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루이 14세의 군대는 ‘사막의 집회’를 뿌리 뽑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재범(?)인 설교자에게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최후: 기록에 따르면 그는 1692년 12월 21일 (또는 그 무렵),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 바로 이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분은 신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잡혀와 처형까지 당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지속적인 신앙의 고백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② 피에르 파퓌스 드 라 베르뒤지 (Pierre Papus de la Verdugie, 1695)
이 분은 이름 옆에 ‘brûlé vif’(산 채로 화형)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대표적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형은 당시에도 가장 공개적이고, 가장 공포를 주기 위한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그를 그렇게 처형했다는 것은, 본보기로 삼기 위한 상징적 인물이었다는 뜻입니다. 국가 권력과 신앙의 충돌을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다른 개신교인들을 침묵시키기 위한 엄중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③ 에티엔 테시에 (Étienne Teissier, 1754)
에티엔 테시에는 이 기념비에 기록된 마지막 순교자입니다.
연도가 1754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낭트 칙령 폐지 후 거의 70년이 지난 시점이고, 계몽주의가 확산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개신교 목회자가 처형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박해가 짧은 시간대의 사건이 아니었고, 한 세대가 아니라 여러 세대를 관통한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박해의 길고 지독한 지속성을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