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펠리에의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조프르 고등학교(Lycée Joffre)는 몽펠리에의 중심 꼬메디 광장에서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곳에 위치합니다. 바로 맞은 편에는 파브르 미술관이 있는데, 이 미술관에서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아담한 공원을 지나게 되는데,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0미터 정도만 올라가면 순교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 나오고, 그냥 직진하면 오늘 살펴볼 조프르 고등학교가 나옵니다.
몽펠리에는 한국 개신교의 뿌리인 개혁주의(Reformed)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위그노(Huguenots)들의 주요 거점중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조프르 고등학교(Lycée Joffre) 땅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위그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 흘려야만 했던 처절한 역사를 간직한 현장입니다.
- 조프르 고등학교가 감옥이었다구요?
몽펠리에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프랑스의 제네바’라고 불릴 만큼 개신교 세력이 강했던 도시입니다. 하지만 가톨릭 왕정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위그노들을 감시하고 진압하기 위한 요새가 필요해졌습니다. 1624년, 루이 13세는 몽펠리에의 위그노들을 진압한 후, 이 도시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개신교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거대한 성채(,Citadelle, 씨따델)를 쌓았습니다. 그 성채가 바로 지금의 조프르 고등학교입니다. 학교의 외벽은 고등학교로서는 필요 이상의 두꺼운 외벽과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곳이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죄수(개신교인)들을 가두고 고문하기며 감시하기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2. 당시 성채 감옥의 구조와 환경
현재 조프르 고등학교의 아름다운 외관 뒤에는 위그노들이 ‘지옥’이라 불렀던 감옥의 구조가 숨겨져 있습니다. 성채의 두꺼운 외벽 아래에는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습한 지하 지하 독방(Cachots) 감옥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환기가 되지 않아 악취가 진동했으며, 여름에는 숨이 막힐 듯 덥고 겨울에는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습니다. 죄수들은 벽에 박힌 쇠고리에 발이나 목이 묶인 채 지냈습니다. 위그노들은 단지 “나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한 마디만 하면 이 지옥에서 나갈 수 있었지만, 수많은 이들이 수십 년간 이 어둠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늙어갔습니다. 감옥 간수들은 수시로 들어와 성경을 빼앗고, 신부들을 데려와 개종을 강요하는 심리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위그노들은 서로 벽을 두드리거나 작은 틈새로 성경 구절을 속삭이며 신앙을 격려했습니다.
3. 위그노들의 고난의 역사 – “광야의 시대”
1685년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였습니다. 이 땅에는 더 이상 위그노들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 법은 더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 개혁신앙을 가지고 믿음을 지켜오던 위그노들에게는 신앙의 암흑기가 찾아 왔습니다. 이때 조프르 고등학교(당시 성채)는 개신교인들에게 공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곳의 지하 감옥에는 개신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목사님들과 평신도들이 수감되었습니다. 그들은 ‘자백’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여기서 끝까지 버틴 여성들은 근처 에그 목트(Aigues-Mortes)성의 ‘꽁스탕스 탑(진리의 탑 또는 불변의 탑)’으로 보내져 평생 갇혀 있어야 했고, 남성들은 갤리선(노를 젓는 배)의 노예로 팔려 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앞에 있는 공원 또는 페이루 공원에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성채 앞 광장은 위그노 목사님들이 교수형을 당하거나 ‘바퀴 형틀(cadre de roue)’이라는 잔인한 처형 틀에 묶은 후 매질을 하여 처형하거나 화형을 당하는 장소였습니다.
피에르 브르송(Pierre Brousson, 1647–1698)은 1698년 이곳 성채 근처에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광야의 설교자’ 중 가장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원래 변호사였으나 위그노들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목숨을 걸고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1698년, 그는 체포되어 몽펠리에 성채(현재의 조프르 고등학교 부지)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동료 신자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그는 시편 찬송을 크게 불렀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찬송 소리가 너무나 당당하고 평온하여 처형을 집행하던 병사들과 구경하던 군중들이 동요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바퀴 형틀형(Breaking on the wheel)’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는 사지를 꺾어 바퀴에 매다는 가장 잔인한 형벌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앞두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외치며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몽펠리에 위그노들에게 ‘박해는 육체를 죽일 수 있어도 영혼과 신앙은 죽일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성 안에서 박해가 심해질수록 위그노들은 도시 외곽의 숲이나 동굴로 숨어들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특히 세벤느 국립공원 지역은 위그노들이 은신처로 삼던 개신교인들이 주로 숨어들어 지내던 곳입니다. 이 시기를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광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조프르 고등학교의 성벽은 당시 그들이 넘어야 했던 거대한 장벽이자, 그 장벽 안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승리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4. “저항하라”(Resistez)
위그노 신앙의 핵심 단어는 ‘저항’입니다. 단순히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그 어떤 권력이나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영적 저항 정신입니다.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 당시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던 것처럼, 이들은 300년 전 이곳 믿음의 선조들도 개혁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항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5. 현재의 모습
군사 요새에서 교육의 전당으로 (19세기 중반)
17세기 위그노를 탄압하기 위해 세워진 몽펠리에 성채(La Citadelle)는 19세기 중반까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 1880년대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나폴레옹 통치시기), ‘종교로부터 독립된 공교육’을 강화하려는 국가 정책에 따라 이 거대한 군사 시설을 학교로 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1891년: ‘몽펠리에 국립 고등학교(Lycée de Montpellier)’로 정식 개교하며 교육 기관으로서의 첫발을 뗐습니다.
‘조프르(Joffre)’라는 이름의 유래 (20세기 초)
학교 이름인 조프르(Joffre)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조제프 조프르(Joseph Joffre) 원수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조프르 원수는 몽펠리에 인근 리브잘트 출신으로, 이 학교의 전신인 기관에서 공부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1946년, 전쟁 영웅이자 모교의 자랑인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조프르 고등학교(Lycée Joffre, 리세 조프르)**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프랑스 남부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학교
오늘날 조프르 고등학교는 단순히 지역 학교를 넘어 프랑스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공립학교입니다.
프랑스 엘리트 교육의 관문인 ‘그랑제콜’ 입학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매우 유명한 그랑제콜 준비반(CPGE)은 전국적인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도 학교 곳곳에는 여전히 17세기의 성벽, 대포를 배치했던 구역, 과거의 지하 통로 흔적이 남아 있어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