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펠리에에는 개신교 신학대학(Faculte Protestante De Théologie De Montpellier)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몽펠리에는 종교개혁 신학과 위그노(Huguenot)의 피땀 어린 역사가 서려 있는 매우 뜻깊은 도시입니다.
몽펠리에 예사랑교회(한인교회)가 1994년 처음 설립되어 예배를 드려오던 곳이기도 합니다.
몽토방(Montauban)에 있던 개신교 신학교가 1920년 몽펠리에로 옮겨온 후 개신교 신학부가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파리 신학부와 함께 프랑스 개신교 신학원(Institut Protestant de Théologie)의 한 축을 이루어 개신교 목회자 양성 및 학문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몽펠리에 신학교의 역사

위 사진 속 표지석은 몽펠리에 개신교 신학교(현재 프랑스 개신교 신학원 몽펠리에 캠퍼스, Faculté de Théologie Protestante de Montpellier) 건물 내부에 설치된 기념 현판(Plaque)입니다. 이 현판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부터 20세기 몽펠리에에 정착하기까지 프랑스 개신교(위그노 및 개혁교회) 신학 교육이 거쳐 온 굴곡진 역사적 궤적을 연도별로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판 내용 연대별 해설
- 1598년 (몽토방 아카데미 설립) : 앙리 4세의 낭트 칙령 발포 아래 신학, 의학, 법학, 수학, 히브리어, 헬라어 교수를 두고 몽토방 아카데미(L’Académie de Montauban)가 설립되었습니다.
- 1659년 (퓌로랑 이전) : 학생 수가 급증했던 아카데미는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예수회(Jesuits)로 넘어가면서 퓌로랑 아카데미(L’Académie de Puylaurens)로 이전하게 됩니다.
- 1685년 (박해와 십자가) : 루이 14세에 의해 낭트 칙령이 폐지(퐁텐블로 칙령)되면서 아카데미가 폐쇄되고 위그노에 대한 혹독한 박해(십자가)가 시작됩니다.
- 1727년 (로잔 신학교 설립) : 프랑스 내 박해를 피해 앙투안 쿠르(Antoine Court) 목사가 스위스 로잔에 프랑스 개신교 목회자 양성을 위한 로잔 신학교(Séminaire de Lausanne)를 설립하여 ‘광야 교회’ 목회자들을 배출합니다.
- 1802년 (제네바 교육 복원) :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제네바에서 신학 교육이 다시 복원됩니다.
- 1808년 (몽토방 개신교 신학부 복원) :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설립 200주년을 맞이해 프랑스 대학교 체제 내에서 몽토방 개신교 신학부(La Faculté de Théologie Protestante de Montauban)로 다시 공식 복원됩니다.
- 1905년 (정교분리) :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교분리법(Loi de séparation de l’Église et de l’État)에 따라 신학부가 국가(대학) 기관에서 분리됩니다.
- 1920년 (몽펠리에 이전) : 신학부가 학문의 중심 도시인 몽펠리에로 이전하면서 오늘날의 몽펠리에 자유 개신교 신학부(La Faculté Libre de Théologie Protestante de Montpellier)로 새롭게 출범합니다.
- 현판 가장 하단에는 신약성경 성경 구절(갈라디아서 2:5 및 에베소서 4:14)이 헬라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이 표지석은 프랑스 개혁교회(장로교 전통)가 탄압과 폐교, 망명, 그리고 재건의 300여 년 세월을 거쳐 최종적으로 몽펠리에에 정착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물입니다.
몽펠리에 신학교의 역사적 의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인 장 칼뱅(Jean Calvin)의 종교개혁 전통에서 몽펠리에는 프랑스 개혁교회(Église Réformée)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① 종교개혁과 위그노의 보루 (16~17세기)
-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 : 6세기 중반 칼뱅( J. Calvin )의 영향으로 몽펠리에는 개신교 성향이 매우 강해졌으며, 남프랑스 위그노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박해와 광야 교회(Église du Désert) :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기(퐁텐블로 칙령)하면서 프랑스 내 개신교는 불법화되었습니다. 신학교와 예배당이 파괴되었으나, 개혁교회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몽펠리어를 포함한 세벤느(Cvennes) 산악 지대로 들어가 목숨을 걸고 광야 교회(Église du Désert)를 유지했습니다.
② 목회자 양성의 맥 : 몽토방에서 몽펠리에로 (19~20세기)
- 몽토방 신학교의 전통: 나폴레옹 시대 이후 개신교가 재인식되면서 1808년 몽토방(Montauban)에 개신교 신학부가 설립되어 프랑스 개혁교회 목회자들을 양성했습니다.
- 몽펠리에 이전 (1919년): 몽토방 신학부는 1919년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몽펠리에로 이전하여 몽펠리에 개신교 신학부(Faculté de Théologie de Montpellier)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 오늘날의 위상: 현재 파리 신학부와 함께 프랑스 개신교 신학원(IPT, Institut Protestant de Théologie)을 구성하고 있으며, 역사적 개혁교회 신학 전통과 현대 조직신학·주해학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학교와 의과대학의 연관성
몽펠리에 의과대학(Faculté de Médecine de Montpellier)은 12세기에 설립되어 현재 운영 중인 의과대학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합니다. 몽펠리에의 신학교와 몽펠리에 의과대학은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① 학문적 융합: ‘영혼의 의사’와 ‘육체의 의사’
-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몽펠리에 대학교에서는 신학·의학·법학이 인문학적 토대 위에서 함께 발전했습니다.
- 당시 지성인들에게 신학과 의학은 서로 대립하는 학문이 아닌,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영혼(신학)과 육체(의학)를 전인적으로 치유하는 연관 학문으로 인식되었습니다.
② 종교개혁 시기 개신교 의학자들과 신학적 교류
- 16세기 몽펠리에 의과대학은 비교적 자유롭고 학문적 수용성이 높아,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의학자들과 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 당대의 대표적 개신교 의학자들과 위그노 학자들은 의과대학에서 강의하거나 연구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이는 몽펠리에가 남프랑스 개혁주의 지성 공간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③ 카톨릭 교구 신학교 및 의과대학 건물 공유 역사
- 18세기 말 프랑스 개혁기 동안 교회의 재산이 몰수될 때, 과거 교구 신학교 및 수도원 건물들이 국유화되었습니다.
- 이 과정에서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연관 건물 및 수도원 시설 일부가 몽펠리에 의과대학 건물로 재편성되어 사용되는 등, 공간적·역사적 유산도 깊게 얽혀 있습니다.
몽펠리에는 단순한 휴양 도시가 아니라, 칼뱅주의 개혁교회가 탄압 속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켜낸 거룩한 현장입니다. 세계 최고(最古)의 몽펠리에 의과대학이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학문의 전당이었다면, 그 곁을 지킨 개신교 신학교는 오직 말씀(Sola Scriptura)과 은혜(Sola Gratia)로 영혼을 살리는 영적 파수꾼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한국 장로교 목회자들에게 몽펠리에는 신학적 학문성과 영성, 그리고 전인적 치유의 전통이 만나는 프랑스 개혁주의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몽펠리에 의과대학 출신의 설교가, 목사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부터 17세기 잔혹한 위그노(Huguenot) 박해기간 동안,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수학·졸업한 뒤 개신교(개혁교회) 목회자가 되거나, 반대로 목사로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이자 목사(Physician-Pastor)’로 활동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기욤 드 론느(William De Laune, c. 1530–1610)
몽펠리에 의과대학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개신교 목사는 기욤 드 로네(William De Laune)입니다. 그는 파리와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약 8년간 당대 최고의 교수들에게 의학을 배웠는데, 의학 공부를 마친 1558년, 프랑스 개혁교회의 정식 안수 목사(Ordained Minister)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내 종교 박해(위그노 박해)를 피해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뒤, 런던의 위그노 망명자 교회에서 목사로 사역함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며 성도들의 영혼과 육신을 함께 돌보았습니다.그의 가문은 훗날 영국 약사회(Society of Apothecaries)의 기틀을 다지는 등 의료계에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목사, 설교자들이 몽펠리에 의과 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6~17세기 남프랑스 개혁교회 역사를 볼 때, 몽펠리에 의과대학 출신 목회자가 배출된 배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 지적·영적 아지트였던 몽펠리에:몽펠리에 의과대학은 당시 개방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어 가톨릭 국가 내에서도 개신교도(위그노) 학자들과 학생들이 대거 모여들던 유럽 중심지였습니다.
- ‘영혼과 육체의 전인적 치유’라는 인문주의관:종교개혁기 지성인들에게 의학(육신의 치유)과 신학(영혼의 구원)은 대립되는 분야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섬기는 연관된 학문이었습니다.
- 박해기 ‘광야 교회’ 시절의 생존 전략:1685년 낭트칙령 폐기 이후 개신교 목회는 불법이 되었고, 목사들은 신분을 숨겨야 했습니다. 의사 자격증은 박해를 피해 산악 지대(세벤느 등)나 교외를 오가며 비밀리에 목회를 하기에 가장 완벽한 신분 위장책이자 사역 도구였습니다.
사진으로 몽펠리에 신학교 돌아보기








몽펠리에 개신교 신학교를 졸업한 한국인
박건택 목사, 김성규 목사, 최숙희 목사, 구기정 목사, 강응섭 목사, 오현석 목사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몽펠리에 신학교의 홈페이지
https://ipt-edu.fr/facultes/montpellier/
몽펠리에 신학교의 위치
주소 : Rue du Dr Louis Perrier, 34000 Montpelli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