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브르 미술관이 이런 곳이었다구요?

파브르 미술관은 몽펠리에 시내 꼬메디 광장 옆 산책로인 에스플라나드 샤를 드 골(Esplanade Charles-de-Gaulle)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찾기가 매우 쉽습니다.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하지요. 조수아 레이놀즈가 그린 “어린 사무엘”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 보면, 몽펠리에의 파브르 미술관(Musée Fabre)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곳을 넘어, 프랑스 남부 개신교도(위그노)들의 신앙과 삶, 그리고 그들이 이 도시의 역사에 남긴 깊은 족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16~17세기 몽펠리에는 프랑스 개신교의 ‘성채’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낭트 칙령(1598) 이후 개신교도들에게 허용된 안전한 도시 중 하나였죠. 위그노들은 몽펠리에 대학(의학)을 중심으로 지적인 흐름을 주도했고, 상업을 통해 도시의 부를 쌓았습니다. 파브르 미술관의 컬렉션 상당수는 위그노 가문의 기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이 미술관은 위그노들의 신앙 고배적 마음과 사회적 기여가 응축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한국인들에게 “파브르”라는 이름은 “파브르의 곤충기”라는 책으로 인하여 매우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몽펠리에에 파브르 미술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심 반가워 하면서, ‘그럼 곤충학자 파브르가 세운 도서관일까? 파브르와무슨 연관이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두 분 다 프랑스 사람인 것은 맞지만, 『파브르 곤충기』의 저자 장 앙리 파브르(Jean-Henri Fabre, 1823-1915, 아비뇽 근처의 세리냥에서 활동)는 훨씬 후대의 사람이며, 이 미술관의 설립자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 1766-1837, 몽펠리에 출신)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미술관 이름의 주인공인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는 위그노 가문의 후손입니다. 파브르 본인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문의 배경이 있었으나, 그의 뿌리는 이 지역의 견고한 개신교 전통에 연관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은 방대한 작품들을 고향 몽펠리에에 기증하며 “모든 시민이 예술을 향유해야 한다”는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이는 ‘직업 소명설’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개신교적 가치관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파브르(Fabre)’라는 성은 프랑스 남부에서 매우 흔한 성씨 중 하나입니다. 라틴어 ‘Faber(대장장이, 만드는 사람)’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성씨를 가진 가문들 중에 위그노(개신교도)가 유독 많았습니다. 위그노들은 전통적으로 상업, 수공업(대장장이 포함), 금융업 등 실무적인 전문직에 종사하며 부를 쌓았습니다.
곤충학자 파브르 역시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었으나, 자연 속에서 ‘창조주의 정교한 설계’를 발견하려 애썼던 그의 태도는 위그노들의 자연관(자연은 하나님이 쓰신 제2의 성경이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재 파브르 미술관의 본관 건물 중 일부는 과거 랑그독 주(Province de Languedoc)의 주지사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 박해의 총책임자가 살았던 집이라는 뜻입니다. 17세기,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1685년)하고 개신교를 불법화했을 때, 몽펠리에는 개신교 탄압의 최전선이었습니다. 당시 이 건물에 거주하던 왕의 대리인(주지사)들은 위그노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예배당을 파괴하며,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감옥이나 갤리선(노 젓는 배)으로 보내는 박해의 행정 명령을 이곳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특히 ‘드라고나드(Dragonnades)’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군인들은 개신교도 집에 강제로 숙박하면서 고문과 약탈을 일삼았는데, 바로 그 결정이 이루어졌던 곳이 바로 이 관저였던 것입니다.

미술관 바로 건너편에는 조프르(Joffre) 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과거 몽펠리에에 군사들이 주둔하던 성채(La Citadelle, 라 씨따델)였습니다. 이 성채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 안의 개신교인들(위그노들)을 감시하고 진압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위그노가 체포되면 이 성채와 인근 관할 구역에 갇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현재 미술관이 서 있는 이 땅 자체가 위그노들에게는 공포와 인내의 현장이었던 셈입니다.

한때 개신교도를 탄압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던 이 건물이, 19세기 들어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라는 인물에 의해 ‘모든 시민을 위한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과거 박해받던 위그노 가문의 후손들이 상업과 금융으로 성공한 뒤, 자신들의 소장품을 이 미술관에 대거 기증했습니다. 박해의 주체였던 국가의 건물을, 박해받던 자들의 후손들이 예술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이 화려한 미술관 건물은 300년 전만 해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던 서슬 퍼런 박해의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흐른 뒤, 그 아픔의 장소를 아름다운 예술품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꾸셨습니다. 특히 박해를 견뎌낸 위그노 후손들이 기증한 작품들이 이곳을 채우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권력은 유한하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헌신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①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 (정물화와 풍속화)

파브르 미술관은 수준 높은 네덜란드 회화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그러한 신앙적 표현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화려한 꽃 옆에 놓인 해골이나 시든 잎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바니타스(헛되고 헛되도다)’를 상징합니다. 세속의 영광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던 위그노들의 내세관을 설명하기 좋습니다.

② 프랑수아 제라르의 <에로스와 프시케> 혹은 신고전주의 작품들

위그노들은 절제와 이성을 중시했습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로코코 양식보다는 명확한 선과 도덕적 교훈을 담은 신고전주의를 선호했습니다. 신앙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내했던 위그노들의 강직한 성품이 예술적 취향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③ 바질(Frédéric Bazille, 프레드릭 바지으)와 인상주의의 서막

몽펠리에 출신의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으는 아주 독실한 위그노 가문 출신입니다. 그의 대표작 <가족 재회> 등을 보면, 위그노 상류층의 단정하면서도 엄격한 분위기, 그리고 가족 간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간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젊은 나이에 전사했는데, 그의 짧은 삶은 신앙 안에서 헌신했던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낭트 칙령 폐지 이후 위그노들은 산속과 들판에서 숨어 예배드렸습니다. 이 시기를 ‘광야의 시대’라고 하고 그 때의 신앙관을 광야 교회(Église du Désert)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파브르 미술관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일상을 일구었던 위그노들이 세상에 남긴 ‘거룩한 흔적’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들의 ‘견디는 믿음’이 큰 울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소: 39 Bd Bonne Nouvelle, 34000 Montpellier, France 구글 지도에 찾기
몽펠리에 중심가인 **코메디 광장(Place de la Comédie)**에서 도보로 약 5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산책로인 에스플라나드 샤를 드 골(Esplanade Charles-de-Gaulle)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찾기가 매우 쉽습니다.

홈페이지 : https://www.museefabre.fr/

관람 시간
화요일 ~ 일요일: 오전 11:00 ~ 오후 6:00
월요일: 정기 휴무 (손님들과 일정을 잡으실 때 월요일은 피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