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유적지 애그-모흐트(Aigues-Mortes)

몽펠리에에 살고 있는 개신교인이라면 누구든지 꼭 방문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적지가 바로 애그-모흐트(`Aigues-Mortes)입니다. 몽펠리에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기도 하고,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개신교 저항운동의 핵심 아이콘과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은 중세 시대에 세워진 성입니다만,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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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의 Aigues-Mortes(애그모흐트)는 중세 성곽 도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개신교(위그노) 역사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난을 견딘 장소’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Tour de Constance(뚜흐 드 꽁스땅스: 콩스탕스 탑, 진리의 탑, 불변의 탑)은 프랑스 개신교인들에게 순교와 신앙의 인내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는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인들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렀습니다. 남프랑스, 특히 랑그독(Languedoc) 지방에는 개신교인이 많았습니다. 몽펠리에, 님(Nîmes), 알레스(Alès), 위제(Uzès) 등도 중요한 개신교 도시였습니다. 애그모르트 주변 지역에도 상당수의 개신교인이 살았습니다.

1598년,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개신교를 이단 취급하며 박해, 학살하던 상황을 멈추게 하고 개신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고,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일정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프랑스 시민권 등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개신교 예배는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목사는 해외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성도들은 강제로 개종을 당해야 했고, 예배당은 파괴되었으며, 많은 성도들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런 박해를 견디지 못한 많은 개신교인들은 해외로 망명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Tour de Constance(꽁스탕스 탑)은 원래 중세시대 성의 방어를 위해 세워진 탑이었습니다. 그러나 17~18세기에는 개신교 여성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예배를 드렸다는 이유,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 만으로 수감된 여성들이 수십 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20년, 30년, 거의 40년 가까이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을 이렇게 감금해 두었던 이유는 가톨릭에서 이들을 재교육하기 위해 수녀원 같은 곳에 수감한 결과, 성경에 박식하였던 이들에 의하여 오히려 수녀원이 개신교화 하는 현생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는 것에 능하였으며,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교황의 말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수녀원에서 그들의 성경 지식을 당해낼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찾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가톨릭의 맹점을 발견하게 되고,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너무도 다른 것을 그들이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성에 수감되어 있던 수감인들 중에 마리 뒤랑은 가장 유명한 여성입니다. 마리 뒤랑(Marie Durand, 마리 뒤헝, 1711–1776)은 프랑스 개신교(위그노)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앙의 증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화려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기보다, 오랜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평범한 신앙인으로 기억됩니다.그녀는 1711년 개신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오빠 피에르 뒤랑은 개신교인 목사로 사역하다가 몽펠리에 에스플라나드 광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녀 역시 개신교인이라는 이유로 19세에 체포되어 이 성에 수감되어 약 38년 동안 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죄목은 단 하나였습니다. 개신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감옥에서 절망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여성들을 격려했고, 함께 기도했으며, 성경 말씀을 암송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족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에는 원망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 많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자유를 원했지만, 신앙을 버리는 조건의 자유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38년 동안 이곳에서 수감 생활을 하며, 들어온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1768년, 여러 사람의 노력과 국제적인 관심 속에 마리는 석방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약 57세였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셈입니다. 석방 후에도 큰 부나 명예를 얻지 못했습니다.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생애를 보냈고, 177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는 대단한 설교자도, 신학자도, 정치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개신교는 그녀를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신앙은 평범한 사람도 끝까지 지킬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가 고난 속에서도 함께한다는 것, 양심의 자유는 큰 희생으로 지켜졌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Tour de Constance를 방문할 때 마리 뒤랑을 함께 기억합니다.

그들이 수감되어 있던 감옥에는 Résister(헤지스테: “저항하라”)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누군가가 새겨놓은 이 프랑스어 Résister(저항하라, 굳게 서라), 이 한 단어는 “신앙을 버리지 말라. 믿음을 지키라.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프랑스 개신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애그모흐트에 방문하시면 이 글씨를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