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귀엠 르 데제흐와 종교 전쟁

생 귀엠 르 데제흐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에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의 기독교 역사 특히 위그노 전쟁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만 카톨릭 중심지로서의 긍정적인 역사라기보다는, 프랑스 종교전쟁(Guerres de Religion) 시기 위그노(Huguenots, 프랑스 개신교인) 군대에 의해 마을과 수도원이 장악되고 파괴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몽펠리에를 포함한 옥시타니 및 랑그독 지역은 역사적으로 개신교(위그노)의 세력이 매우 강력했던 지역이었습니다. 타 지역 위그노들에게는 교두보의 역할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의 주요 성지였던 생 귀엠 르 데제흐는 격렬한 종교 갈등의 중심에 서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젤론 수도원(Abbaye de Gellone)

16세기 후반 프랑스를 혼돈에 빠뜨렸던 신구교의 종교전쟁은 프랑스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1568년 개신교 위그노 군대(카미자르 군)는 이 마을을 기습하여 점령하였습니다.

  • 수도원 약탈: 위그노 군대는 가톨릭 성지이자 당시 엄청난 부와 유물을 축적하고 있던 젤론 수도원(Abbaye de Gellone)을 거칠게 공격하고 약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도원의 수많은 정교한 석조 조각과 성상들이 개신교의 우상숭배 타파 기치 아래 파괴되었습니다.
  • 주민들의 희생: 당시 마을의 가톨릭 주민들은 수도원과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바로 그 십자가의 조각 중의 일부라고 믿어졌던 나무 조각(“참십자가 조각”이라고 불림 )등의 종교적 유물들을 지키기 위해 위그노 군대에 맞서 싸우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위그노의 습격 이후, 살아남은 가톨릭 신부들과 교인들은 재차 발생할지 모르는 개신교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화 작업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이때 파괴된 수도원을 보수하고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수도원이 보유하고 있던 귀중한 가구와 집기류, 남은 보물들을 처분하여 방어 비용을 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7세기 말,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면서 개신교를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 북쪽의 세벤느(Cévennes)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개신교 농민들의 무장 봉기인 ‘카미자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생귀엠 르 데제흐를 둘러싼 험준한 에호지역 협곡과 산악 지형은 당시 개신교 군(카미자르 군)이 이동하거나 숨어들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마을 주변 지역 전체가 개신교 저항의 역사적 무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신교(위그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생 귀엠 르 데제흐젤론 수도원(Abbaye de Gellone)을 향한 공격은 단순한 방화나 약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쌓인 피비린내 나는 탄압에 대한 처절한 생존 투쟁이자, 칼뱅주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결단이었습니다. 위그노들은 왜 그렇게 격렬하게 가톨릭 성지를 파괴하고 공격해야만 했을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560년대 프랑스 전역에서 구교가 개신교인(위그노) 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고 박해, 추방, 시민권 말살 등 극단적 조치를 취하였을 때, 가톨릭 왕정과 교회는 개신교도들을 사탄의 무리로 규정하고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특히 몽펠리에와 님므(Nîmes) 등 개신교도가 다수를 차지했던 랑그독 지역의 위그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군사적 요충지 확보: 생 귀엠 르 데제흐는 험준한 바위산과 에호 협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위그노의 입장에서 이곳을 가톨릭 군대(왕의 군대)가 요새화 하도록 놔두는 것은 몽펠리에를 비롯한 개신교 거점 도시들의 배후를 위협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 적의 거점 무력화: 따라서 가톨릭의 정신적·경제적 중심지인 젤론 수도원을 선제 타격하여 무력화하는 것은, 가톨릭 군대의 보급로를 끊고 자신들의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군사 작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그노들이 수도원의 대리석 기둥을 부수고 성상과 십자가를 훼손한 행위는, 그들의 신학적 관점에서는 ‘오염된 성전을 정화하는 거룩한 의무’였습니다.

  • 말씀 중심의 신앙: 장 칼뱅(Jean Calvin)의 개혁주의 신학을 따른 위그노들은 성경 말씀 외에 그 어떤 형상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가톨릭 성당 가득한 성인들의 조각상, 그림, 그리고 ‘참십자가 조각’ 같은 성물(Relics)들은 성경이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극치였습니다.
  • 미신 타파: 위그노들은 성물에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는 가톨릭의 전통을 신앙을 타락시키는 미신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수도원의 성상을 파괴한 것은 가톨릭의 종교적 기만을 폭로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개혁의 실천이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은 민중들에게 막대한 십일조와 면죄부(대사)를 판매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개신교도들은 개혁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을 잃고 재산을 몰수당하였습니다. 위그노들은 이와 같은 불공정한 처사를 방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했던 위그노 군대에게, 금은보화로 가득한 젤론 수도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이 아니라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부가 민중을 수탈해 모은 부당한 재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몰수하여 개신교 방어군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1685년 낭트 칙령이 폐지되면서 개신교는 완전히 말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위그노의 예배당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목사들은 처참하게 처형을 당했으며, 평범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되거나 감옥에 갖히거나 노예선(Galley)의 노젓는 일을 위해 끌려갔습니다.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세벤느 산맥과 생 귀엠 협곡으로 숨어든 개신교 농민들(카미자르)에게는 사실상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험준한 계곡을 무대로 가톨릭 왕군을 기습하고 게릴라전을 펼친 것은, 국가의 폭력적인 강제 개종에 맞서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 귀엠 르 데제흐는 가톨릭에게는 ‘약탈당한 평화로운 성지’였지만, 위그노에게 ‘우상숭배의 요새’이자 ‘자신들을 학살하려는 적들의 전진기지’였습니다. 그들이 수도원에 세워진 각종 우상들을 부수고 협곡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것은,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가톨릭의 압도적인 탄압 속에서 오직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고 살아남기 위해 행해야만 했던 처절한 신앙적·군사적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평화롭기만 한 자유 광장. 플라타나스 나무 뒤로 보이는 오른쪽 건물이 수도원(성당)